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5세 (문단 편집) === [[콘스탄티노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불가리아 원정]] === 740년대 후반의 승리로 시리아, 아르메니아 인들이 제국에 투항하였는데 콘스탄티노스는 게르마니케아로의 이주로 빈 땅이 생긴 트라키아 북부에 그들을 정착시켰고 새로운 성을 쌓았다. 이에 불가르 측은 716년의 협약 (비무장지대 설정) 위반이라 주장하며 [[코르미소쉬]] 칸의 지휘 하에 남하하였지만 아나스타시아 성벽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완패했고, [[비네흐]]가 쿠데타를 일으켜 새 칸으로 등극했다.(756년) 이후 전쟁은 매년 이어졌다. 759년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Rishki_Pass| Rishki Pass의 전투]]에서 불가리아가 이겼지만, 그 여세를 몰아서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평화협정을 맺자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비네흐와 그 일가를 모두 죽이고서 [[텔레츠]]를 새 칸으로 옹립했다. 불가리아의 슬라브인들은 이런 정세불안으로 제국으로 피난 왔고, 이들은 아나톨리아로 이주되었다.[* 이렇게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재배치된 슬라브인을 가리키는 ([[영어 위키백과]])'[[https://en.wikipedia.org/wiki/Asia_Minor_Slavs| Asia Minor Slavs]]'라는 용어까지 있다. 이들의 후손 중 하나가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반란군의 주동자였던 [[슬라브인 토마스]]이다.] 참고로 이렇게 유럽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것은, (멀리 재배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이산가족]]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인적 집단 자체를 한 덩어리로 유지시키지 않고 분산배치했던 것과 더불어, 로마의 전통적인 [[디바이드 앤 룰]] 통치술이었다.[* 서로마 멸망의 신호탄은 로마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협상력이 떨어져, 이민족에 대한 이 전통적인 정책(뭉쳐서 살려면 멀리 가든가, 아니면 흩어져 살든가)의 강요가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고트족]]이 멀리 가지도 않으면서[* [[다뉴브 강]] 유역 중하류의 강 너머에서 강 이쪽으로 넘어온 것에 불과하다.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 반도, 남프랑스 등에 [[서고트 왕국]]이 세워지는 것은 그 시점으로부터 수십년 뒤의 일이다.] 종족 단위로 뭉쳐 있는 상태로 제국 영내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아예 자기의 연고지와 한참 먼 지역으로 재배치되면 그 곳 현지인들과는 말부터가 잘 안 통하니 뭉쳐서 반란을 선동한다던지 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기댈 데는 제국 당국밖에 없게 된다. 동쪽 출신 사람을 서쪽에, 서쪽 출신 사람을 동쪽에 배치함으로써 제국 내 지역색을 줄이고 통합을 추구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763년 6월 30일에 큰 전투가 일어났는데([[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nchialus_(763)| Battle of Anchialus (763)]]), 콘스탄티노스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친정하여 하루종일 벌어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오랜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개선식과 그를 기념하는 경기가 열릴 수 있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새 칸으로 옹립된 [[텔레츠]]는 얼마 재위 못 하고서 이 패배의 책임을 묻고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추대된 [[사빈(불가리아 제1제국)|사빈]] 칸은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유약해 보인다고 또 귀족들이 분개해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했다고 한다.[* 출처: 'Eastern Roman History' 유튜브의 [[https://www.youtube.com/watch?v=BXNGzp8NQsQ| Constantine V: The Dung-named Dragon-slayer]]] 이후 [[우모르]]가 칸에 올랐으나 40일 만에 [[토크투]], 바얀 형제에게 피살되었고, 이들 형제 역시 1년밖에 버티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뒤이어 새 칸으로 등극한 [[파간(불가리아 제1제국)|파간]]은 동로마 제국과의 협상을 원했고, 콘스탄티노스 5세와 협상을 논의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자리에서 불가리아인들의 변덕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불가리아의 평화를 수호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협상은 성공리에 마무리되는 듯했고, 파간은 수도로 귀환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돌연 기습을 가해 불가리아 영내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이에 불가리아인들이 격노하여 파간에게 책임을 물었고, 그 역시 1년 만인 768년 피살되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칸이 7명이나 전쟁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교체되는 엄청난 불안정에 빠졌는데, 이는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재위 기간이 길었고, 또 이탈리아를 과감히 손절하며 이슬람 세력도 정권교체로 정신이 없었던 덕에 불가리아에 집중할 여력이 되어 꾸준하게 공세를 넣었던 것이 누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e_V| Constantine V]] 문서 중, 'The cumulative effect of Constantine's repeated offensive campaigns and numerous victories caused considerable instability in Bulgaria, where six monarchs lost their crowns due to their failures in war against Byzantium.'] 이와 같은 불가리아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황제로 동로마인의 집단의식에 강하게 각인되었는지, 수십 년 뒤인 812년, [[니키포로스 1세]]가 이끄는 로마군이 그 전 해 811년에 플리스카에서 [[크룸]]의 매복에 걸려서 황제 본인까지 전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 목전까지 역공해 온 불가리아군의 위협에 맞닥뜨리게 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묘역에 몰려가서 석관에서 '''시신을 끌고 나온 후''' 시신을 향해서 "깨어나서 위험에 처한 그대의 신민들을 구해주시옵소서"하고 외쳤다고 한다.[* Sergio Bertelli의 'The King's Body; Sacred Rituals of Power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Europe' 중 30p, 원문: 'At the time of the siege of Constantinople by the Bulgars, in 812, the crowd broke down the gates that led to the imperial tombs and dragged the body of Constantine V from its sarcophagus, crying: "Arise! Save your endangered people!"'] 평시라면 대단한 불경죄였겠지만, 대패하고 난 직후인데다가, 침략자가 아닌 내국인으로서 황제의 묘역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말이 시민이지 평범한 시민이라기보다는 귀족, 유력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여하튼 이후 772년, 773~774년, 774~775년에도 불가리아에 계속 전쟁을 벌였는데, 앞의 둘은 일진일퇴였던 것으로 보이고, 뒤의 전쟁은 선공을 들어온 것을 성공적으로 막고서 해군으로 역공을 가려는데 역풍이 불어 좌절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Telerig| Telerig]] 문서 중, 'However, in October 774, Telerig sent an army of 12,000 men to raid Berzitia, Macedonia, and transfer its population to Bulgaria.' 및 'Constantine surprised the Bulgarians and won a resounding victory. The subsequent attack on Bulgaria failed since the imperial fleet had encountered contrary winds in the Black Sea.'] 그리고 나서 [[텔레리그]] 칸은 위에서 나온 전임 칸들과 똑같이 전쟁 패배로 왕위가 위태로워지자 밀서로 망명 의사를 전하면서 불가리아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물어봤는데 황제가 왜였는지 몰라도 그 명단을 알려주자 칸은 쟤들이 스파이들이구나 하고 모두 처단했다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e_V| Constantine V]] 중, 'In 775, the Bulgarian ruler Telerig contacted Constantine to ask for sanctuary, saying that he feared that he would have to flee Bulgaria. Telerig enquired as to whom he could trust within Bulgaria, and Constantine foolishly revealed the identities of his agents in the country. The named Byzantine agents were then promptly eliminated.'] 이에 대한 보복으로 775년 8월에 재차 친정에 나선 콘스탄티노스는 폭염으로 다리가 붓자 아르카디오폴리스를 거쳐 회군하였는데, 수도를 목전에 두고 배 위에서 죽었다.(9월 14일) 향년 57세였다. 한편 텔레릭은, 앞선 것처럼 궁정 내 동로마 스파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동로마로 망명할 경우에 예상되는 후환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귀족들을 더더욱 두려워했는지, 콘스탄티노스의 아들로서 새로 즉위한 [[레온 4세]]에게 망명을 타진하였다. 동로마 당국은 이를 받아들여, 피난처를 제공하고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주었으며, [[이리니]] 황후의 사촌을 결혼상대로 붙여주었고 테오필락토스라는 세례명을 주어 [[정교회]]로 개종시켰다.[* [[https://en.wikipedia.org/wiki/Telerig| Telerig]] 중, 'In spite of his apparent success, Telerig found it necessary to flee to the new Byzantine emperor, Leo IV the Khazar, in 777. The Byzantine government gave Telerig asylum and the title of patrikios. Telerig converted to Christianity under the name of Theophylaktos and married a cousin of Empress Eirene.'] 부황이 적국 군주 때문에 원정을 나갔다가 병이 악화되어 죽었는데도, 그 [[원흉]]인 적국 군주가 망명해 오자 대접을 잘 해주는 것이 재미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